시와수필

정승원 닭갈비의 추억(정승원)

webmaster 2016.03.27 16:53 조회 수 : 86

애틀랜타에 이사 와서 놀라고 감동까지 한 것은 어느 한국 식당 앞에나 흔하게 쌓아놓은 공짜 신문이었다. 시카고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니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각각 다른 이름의 신문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고 LA, NY판이 그대로 복사되어 나오는 것을 안 뒤론 감동이 식긴 했다. 그러나 모 일간지는 미국 영자 신문을 잘 번역해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기에 열심히 읽는다.

어느 날 신문을 들고 와 우선 제목부터 대강 훑어보며 넘기는데 춘천 식 닭갈비 식당이라는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닭갈비? 한 번 가서 먹어 볼까? 하지만 어떤 식당 막국수처럼 실망하진 않을는지 모르지 하며 생각해본다.

닭갈비 하면 추억이 있다. 춘천에서의 호된 시집살이 시절이다. 학교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 하며 겅정겅정 뛰어다 보니 김치 한번 안 담가보고 시집을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데다가 싹싹하지도 않은 맏며느리가 몹시 마땅치 않았는지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꾸지람만 하였다.

무심한 신랑은 새색시 손등이 터져서 혼수로 해간 양단 이불에 꺼끌꺼끌 스치는 것도 모른다. 그래도 애달픈 새댁의 설움을 알아주는 사람은 이웃 아줌마들이었다. 1970년대 그때만 해도 춘천은 시내 중심가라고 해도 한산해서 서울서 태어나고 자란 내 눈에는 시골이었다.

집집이 나지막한 담은 둘렀지만, 앞 뒷집, 옆집에서 개 짖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고 저녁반 찬으로 고등어를 굽는지 김치찌개를 끓이는지 서로서로 다 알 수 있는 모양새의 집 구조였다.

마당이 넓고 대추나무 앵두나무가 우거진 시댁은 서울 새댁이 나무그늘에 앉아 숨어 눈물 짜기에 적격이어서 아무도 모르게 운다고 생각했지만, 앞뒷집, 옆집으로 어느새 정보가 새어나가서 이웃 아줌마들의 동정 대상이 되어있었다.

어느 날 그 날도 한바탕 시어머니의 호통을 들은 뒤에 서울친정이 생각나고 홀어머니가 보고 싶어 앵두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뒷집 장독대위로 ㅈ엄마가 손짓을 하며”새댁, 이리 잠깐 나와. 닭갈비 먹으러 가자.” 닭갈비라니. 닭에도 갈비가 있나. 후딱 눈물을 닦고 따라가 보니 벌써 다른 두 아줌마가 기다리고 있다가 앞장을 선다.

거리엔 안개비가 내리고 우산도 쓰지 않은 네 여자가 들어선 곳은 여기저기 닭 갈비라고 간판이 붙은 술집들이 있는 뒷골목이었다. 닭갈비 4인분에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켜 벌겋게 달은 연탄불이 담긴 드럼통 주위에 둘러앉아 삽시간에 시어머니들 성토 장소가 되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닭갈비 맛에 빠져 무슨 주제로 말하는지 상관없이 애달픈 시집살이 생각만 하며 아구아구 먹기만 하였다.

그때 닭갈비는 큼직하게 토막 친 닭고기, 감자, 호박 마늘 파를 넣어 소금으로 간한 뒤에 달구어진 번철에 콩기름을 두르고 구워서 먹는 것인데 막걸리를 마셔가며 닭고기와 야채를 골라 먹는 맛이 서러운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그 후로도 아줌마 4인 방은 가끔 모여서 닭갈비 안주로 막걸리 마시며 원탁회의를 하곤 했는데 눈물겨운 시집살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닭갈비의 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요즘은 입맛도 세계화되고 다들 호사스러워져서 닭 요리도 갖은 양념이 다 들어가고 조리법도 다양해 졌지만 지금도 난 양념 많이 안 하고 재료의 맛을 살린 담백하고 소박한 음식을 좋아한다.

그리고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옆집 새댁의 서러움을 위로해 주던 아줌마들이 그립다. 이젠 그 아줌마들이 성토의 대상이던 시어머니가 되어 늙어가고 있겠지 나처럼.

추억의 닭갈비, 언제 한 번 먹으러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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