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수필

정승원 내사랑 치자나무(정승원)

webmaster 2017.02.12 15:35 조회 수 : 28

늦가을이다. 4계절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지만 올해는 여름부터 지금 12월까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어 천지사방이 바삭바삭 마르고, 곳곳에 산불이 번져 메케한 연기 냄새의 새벽녘, 신선한 공기를 들이려 창문을 열던 습관마저 망설이게 된다.

 

하마 오늘은 비가 좀 오시려나!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새들마저 날지 않는다. 앞마당 작은 꽃밭에도 그 곱던 꽃들이 다 말라 죽고 말라 비틀어진 줄기에 힘없이 매달린 몇 잎 잎사귀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래도 여름내 매일매일 호스로 물을 뿌려줬는데 인공으로 주는 물로는 이 혹심한 가뭄을 당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정원을 가꿀 줄 아는 분들에게서 배운 이야기지만 “정원의 시작은 11월이다.”

웬만한 작은 꽃씨는 가을에 뿌려놓으면, 겨울 동안 부지런히 잎눈을 맺어 봄이 되면 찬란한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러나 올해는 씨를 뿌릴 수 없이 땅이 메말라서 꽃피는 봄을 기약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이 내가 사랑하는 치자나무 두 그루가 누렇게 마르기는 했지만 목숨을 부지하여 예쁜 치자열매를 조랑조랑 매달고 있는 것이다.

 

8년 전 이 집에 이사 와서 꽃밭을 만들고 뒷마당에는 대추, 매실, 나무, 배나무 등

과일나무를 고루고루 심었었다. 그런데 묘목을 사러 갔던 농장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치자나무였다. 실용주의자(?)인 남편은 “먹지도 못하는 치자나무는 뭣하러 심느냐"고

반대했지만 나이 70에도 철딱서니 없이 꿈속에 사는 나는 “치자가 얼마나 유용한 열매인가”를 주저리주저리 설명해가며 두 그루 치자나무를 꽃밭 입구 돌배나무 양쪽으로 심어 놓았다.

 

사실 치자열매는 먹지는 못하지만 미지근한 물에 우려내어 부침개 반죽할 때 색깔을 내기도 하고 또 어릴 때 엄마가 명주에 노랑 물감 들일 때 쓰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야 화학염색 약품을 써서 번쩍번쩍 찬란한 노랑색을 내지만 치자 물들인 명주 저고리는 은은한 노랑 빛에 부드럽고 깊은 맛이 나는 베이지색에 가까운 노랑이었다.

그리고 초여름, 끈적하고 나른한 날씨에 기분이 흐리멍덩해질 무렵 순결한 하얀 빛으로 피어나는 꽃과 정신이 바짝 나는 듯한 그 향기, 솔직히 말하면 내 기대에 넘치도록 풍성한 치자 꽃을 피워주고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그 산뜻한 향기는 여름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때 남편은 이 나무에 접을 붙여 핑크색 겹꽃을 피운다나 하는 아리송한 주장도 했지만 눈물까지 글썽이며 결사반대 하는 마누라고집을 꺾지는 못하고 항상 못마땅한 눈길로 치자나무를 보고 있다.

“치자나무야 미안해"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무는 무엇보다 나무가 되어야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나무는 나무가 됨으로써 하느님을 닮게 된다고.

치자나무는 치자나무가 됨으로써 하느님을 닮게 된다. 핑크 꽃은 무슨 핑크 꽃! 소박한 홑겹 흰 꽃이 나는 너무 좋은데…나도 나답게 내가 되어야 하느님을 닮게 되겠지. 그러니까 철딱서니 없고 현실감각이 없는 할망구지만 그래도 그게 나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가야겠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나답게 좋은 대로  좋아하는 꽃 가꾸며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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