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수필

정승원 봄비는 내리지만(정승원)

webmaster 2017.04.19 23:30 조회 수 : 49

창밖에 비가 내린다. 춘분을 며칠 앞둔 봄날 한밤중. 포근한 공기를 적시며, 어둠에 물든 대지를 어루만지며,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타고난 잠꾸러기인 데다가 봄비까지 나른하게 내리는 밤, 나답지 않게 잠을 설치며 엎칠락 뒤치락을 해도 잠은 영영 오지 않고 오늘 낮의 일이 어둠 속인 데도 어디로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럽게 생각난다.

 

오늘 낮의 일이다. 가까운 이웃에 사시며 가끔 밥도 같이 먹고, 산책도 같이하는 남편의 대학 선배님을 만났다. 이분들은 좋은 선배님이며 가까운 이웃이라 깍듯이 어른 대접을 해드리고 존중해 드렸는데 언제부터인가 전화도 받지 않고 우연히 만나도 외면을 하셔서 처음엔 영문을 몰라 이상했지만, 번번이 그런 일을 당하고는 그냥 불편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치부해 버렸었다. 그런데 오늘 다행이 그분께서 이유를 말씀해 주셨다. 작년 가을, 무슨

일로인가, 전화를 걸었는데 내가 전화가 끊긴 줄 알고, 그분들 험담을 한 것을 고스란히 들으셨다고.

 

스마트폰이 가끔은 스마트하지 못해서 어쩌다 조작이 잘못되는지 전화를 끊고 나서도 상대방의 이야기가 계속 들리는 경험을 나도 가끔 했었다. 평소에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신 그분들이 오만하고 지나치게 인색했다고 생각했던 나 인지라 오래전 일이라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여과되지 않은 말을 남편에게 한 것을 들으신 모양이다. 당장 사과하고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그분의 마음도 풀리지 않으셨을 테고 내가 한 짓이지만 마음도 너무나 불편하고 부끄럽다. 그날 그 시간을 커다란 지우개로 싹 지워 버리고 싶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분은 얼마나 충격을 받으셨을까. 없는 말이야 아니지만 70 넘은 여자가 사람 좋은 얼굴로 “이것도 좋아" “저것도 좋아"하면서 지냈는데 뒤에서 그런 험담을 하는 것을 들으셨을 때,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끼셨을까. 사노라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 또한 그렇듯이 결점 없는 사람은 없는데 그걸 끄집어내어 험담을 하려고 들면 거기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잘난 척하는 게 싫다고 하는 나의 속마음은 사실은 잘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의 밖으로 나타난 표현이겠지. 정 따로 흉 따로 라고 두리뭉실 면죄부를 주어가며 남을 함부로 판단해왔던 내가 정말 부끄럽다.

 

 “스스로와 사이가 나쁘면 다른 사람들과도 사이가 나쁘게 된다"라는 발자크의 말이 생각난다. 아마 그 무렵 내가 나 자신과 너무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닐까” 사순절을 지나며 나를 돌아보고, 고통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이 시기에 내가 저지른 경솔한 죄를 가슴 깊이 뉘우치며 상처받으신 그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죄 드린다. 그리고 할망구가 되어서도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나를 도와 주소서” 기도 드린다.

 

창 밖의 빗소리만 헤아려보며 잠들지 못하는 밤이다. 지금도 새롭게 와 닿는 작고하신 피천득 교수님의 수필을 생각해 본다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젊잖게 늙어가고 싶다’

 

나도 젊잖게 늙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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