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수필

정승원 겨울에 내리는 봄비(정승원)

webmaster 2016.01.18 17:31 조회 수 : 469

겨울에 내리는 봄비                                

                                                                                             정 승 원

                                                             

 

비가 내린다. 봄비 같은 겨울비가 내린다. 울타리 넘어 숲에서 피어 오르는 촉촉하고 따뜻한 안개가 메마른 내 마음마저 포근히 감싸주는 듯하고 눈부신 연둣빛으로 돋아나는 달래와 민들레를 보니 아니! 벌써 봄이 왔나? 헷갈리게 할 만큼 올 겨울은 아직은 너무 따듯하다.

 

엘니뇨라나 뭐라나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겨울이 겨울답지 않게 따듯하다는 건 지금 당장이야 좋겠지만 머지않아 덮쳐 올 혹한의 예감에 늙어가는 몸이 벌써 으스스해지고 뼈마디마저 시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밝은 햇빛이 반짝반짝 유리창에 부딪히고 천지사방이 부드러운 비에 젖어 촉촉한 이 좋은 날!

더구나 바람 한 점 없이 따사로운 이 겨울날 아침에 그냥 좋은 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왜 오지도 않은 추위를 미리 겁내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나의 지나온 삶이 나를 겁쟁이로 만든 것 같다. 작은 행복이나마 감사하며 기쁘게 살다 보면 느닷없이 암초가 내 앞에 부딪혀와 작은 행복에 안주하고 싶은 나를 여지없이 차가운 물과 거센 바람에 휘둘리게 한 것 같다. 있는 힘을 다해 차가운 바다를 헤쳐 나오면 내 앞에 펼쳐진 어둡고 추운 세상, 나의 잘못도 아니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그저 벗은 몸으로 고스란히 찬비 맞으며 서 있는 겨울나무들처럼 묵묵히 견디어 왔다.

 

왜? 나에게는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을까. 함께 자라고 같이 공부한 친구, 이웃들은 잘살아가고 있는 데 그럴 때 항상 생각나는 말이 “세상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하신 어느 신부님의 말씀이다. “그러니 이 세상 행복에 연연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주실 영원한 행복을 바라라.”로 결론을 내리셨다면 “너나 그렇게 하세요.” 하고 말았겠지만, 신부님의 결론은 왜 공평하지 않은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누구도 공평한 세상을 만들 수도 없으니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만이라도 남들한테 공평하게 대하며 살자 였다.

 

그래! 이제 허우허우 살아온 내 삶도 70이 넘었으니 수명에 대해서는 불공평했다고 할 수 없고 받은 것 헤아려 보고 이웃도 돌아보며 살아야지. 요즘 한국 티TV에서는 금수저, 흙 수저란 말이 가끔 보도되고 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집안에서 금수저 물고 태어나 어마어마한 돈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가난한 집안에서 흙 수저 물고 태어나 힘들게 사는 이웃들 멸시하며 호화롭게 살다가 그 부와 권세를 자손들에게 물려주려고 온갖 편법을 다 쓰고 있다는 것.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가 다 그것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피땀 흘려 모은 돈 내 마음대로 쓰고, 내 자식한테 물려 주겠다는데, 누가 참견이야? 한다면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이 세상 모든 사람과 만물이 서로 얽혀서 서로가 없으면 무너지는 이치 속에 사는데 금 수저 물고 나온 것이 결코 제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닌데, 그 많은 돈을 나누어주지도 않았으면서 흙 수저 물고 나온 사람들에게 오만을 떨다니. 그리하여 험한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욕이 꺾이고 무릎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다

 

빌 게이츠나 오마하의 성자, 워런 버핏처럼 큰돈을 내놓아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 따듯한 세상을 희망하는 그런 부자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면 난마 같은 우리 사회가 한 모퉁이라도 밝아지고 나 같은 백성의 시린 마음이 조금이라도 데워지지 않을까.

 

내 돈 기부하기 아까우면 쓰는 것이라도 과시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눈에 띄지 않게 쓰면 안 되나. 이 생각 저 생각, 흙 수저 물고 태어나게 한 자식들 걱정에 잠 안 오는 밤, 작고하신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 시집을 보니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말씀이 보인다.

홀가분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 꿈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경지이고, 그래도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 둘러보고 언 손이라도 마주 잡아 녹여주며 불평 말고 살아야 한다.

 

아! 이제 비가 그치네. 텃밭에 계절도 모르고 파릇파릇 돋아난 상추가 제법 소복하니, 달래와 상추 뜯어다가 오늘 점심은 채소 비빔밥 해먹어야겠다.

서비스 링크

X
Login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

아이디가 없으신 분은

회원가입 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