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수필

수 십 년 전에 나는 유학 올 때의 결심도 잊은 듯 결혼하겠다고 허락을 받고자 한국의 어른들께 편지를 보냈다. 얼마 후에 날라온 두툼한 답장에는 남편 될 사람의 성격이나 친구들 얘기, 가족 상황, 이것저것 자세히도 적혀 있었다. 결론은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겠으나 걱정되는 것은 남편 될 사람이 종손일 뿐 아니라 소문난 효자이니 잘 생각해서 결정하란다.  

 

결혼 후 직장 생활에 얽매여 긴 방학을 얻을 수 없어 몇 년을 미루다가 드디어 시댁에 첫인사를 갔다. 오랜 시간을 아이들을 데리고 비행기 안에서 시달린 고통보다는 시댁 어른들을 처음 만난다는 어렴풋한 두려움에 걱정이 더 컸다. 아니나 다를까, 각처에서 작은 아버님들, 고모님들, 육촌 어른들이 조부님이 계시는 시댁에 모여서 호기심이 가득하지만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맞아 주셨다. 시아버님은 종갓집의 아들 넷, 딸 넷 형제 중에 맏아들로 (종손) 집안 행사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하니 고충이 많으시리라 생각됐다.

 

비몽사몽에 아이들 덕분에 나도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시댁의 아름다운 풍경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저 멀리 동이 트는 연한 잿빛 하늘 아랜 나지막한 산들이 아침 안개 밖으로 연두색으로 단장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산등성이에 구부러진 소나무 가지에는 백학들이 날아들고 그 밑에는 쭉쭉 뻗어 올라간 대나무들이 담장처럼 뒤뜰을 둘러싸고 있다. 정신을 차려 어른들께 아침 인사를 드릴 때 친척들이 내게 하시는 말씨에 놀라니 종손에게는 물론 종부에게도 반말을 못 하는 것이란다. 갑자기 종부라는 명칭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하다.

 

며칠 후 증조부의 기제사를 맞았다. 시어머님은 1년에 8번의 봉사(奉祀; 조상의 제사)를 모셨다. 종손인 내 남편은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경제적인 책임은 물론 정신적인 죄의식 같은 강압 감을 가지고 있음을 옆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을 방문하면 짧은 기간에 선산을 돌보는 일로 쫓기다가 수심에 차서 돌아오곤 했다. 세상이 바뀌어 산지기의 위상도 변해 그는 무서운 망태 할아버지도 아니고 벌초나 뫼를 돌보는 고용인도 아닌 듯 기세가 당당하다.   

 

세월이 흘러 조부님도 가시고 홀로 지내시던 어머님도 2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제사는 생전에 뵈온 조상들을 위해서만 지내도 된다는 허락으로 우리는 2대 봉사와 시제사(명절 차례)만 받들고 기존의 유교적 제사법을 교회에서 제시한 가정 제례의식으로 변경해서 지낸다. 멀리 떨어져 사는 아이들이 참석할 수 있을 때는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조상들에 대한 관심에 놀라고 가족이라는 끈끈한 정을 더 느끼는 듯해서 역시 조상을 기리는 전통 의례는 의미가 깊다고 느낀다.  

 

선산을 돌보는 책임은 이역만리서 수행할 수 없어 고충을 겪던 남편은 2012년 윤년 윤달에 생존하신 집안 어른들의 동의를 얻어 선산에 모신 조상님들의 남은 유해를 명정에 싸서 화장하고 비석과 함께 모두 정리했다. 파묘를 하니 석회로 둘러싸인 어느 분의 묘에는 아무런 유골이 남아있지 않고, 어떤 분은 바닥이 단단하고 평평한 지반까지 파 내려가도 재처럼 까만 가루만 보였다. 재의 수요일에 “사람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십시오” 라고 하는 말씀이 생각난다. 남편은 조상님들의 묘를 정리한 후 잡풀이 가득한 산소를 보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졌으나, 마음을 기댈 언덕이 없어졌는지 좀처럼 한국엘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집안일로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는 전통을 뛰어넘더라도 조상을 기억할 뿐 아니라 고충을 감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살피는 종손의 지혜로 살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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