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수필

연말에는 이것저것 못다 한 일과 피할 수 없는 약속들로 날짜가 더 빨리 지나가는 듯하다. 그런데 손자 손녀들이 온다니 틀림없는 비상이다. 한동안 고작 보고 싶다고 전화만 했고 할머니 노릇을 제대로 못 했으니 아마도 새해가 오기 전에 내게 주어진 명예 회복의 기회인가 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꼬마 손님들은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집에서 먹는 것이 좋고 식당에는 가기 싫단다.

 

그믐날에 차례상에 올릴 음식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내 모습이 힘들게 보였던지 떡국만 끓이라는 남편의 말에 왠지 옛 생각이 떠오른다. 5~60년 전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힘들 때도 설 때는 방앗간에서 흰 가래떡을 만들어 와 썰어 말렸다. 그 고생이 없으니 설날 음식을 정성껏 만들자 생각하며 삼색 나물을 만든 후 황색 지단으로 고명을 준비하는데 손녀딸이 엉뚱한 말을 한다. 빨간, 파란색 떡을 함께 썩으면 떡국이 예쁠 것 같단다. 요새 어떤 곳에서는 색색의 떡국도 만든다지만 본래 설날에는 흰 가래떡의 떡국을 먹는다. 이는 한해를 청결하게 살고 무병장수하기를 바라고, 동전처럼 동그랗게 떡을 썰어 재화와 부를 원하며, 해처럼 밝아 만물의 신생을 뜻하기도 한다.

 

 떡국을 희다고 해서 백탕(白湯 )이라 하고, 길게 뽑은 가래떡을 넣어 끓인 탕이라고 병탕(餠湯 ), 또는 설날에 끓여 먹어 한 살을 더 먹는다고 첨세병( 添歲餠 ) 이라고도 했다. 어렸을 적에 노인들이 병탕을 몇 사발 먹었느냐고 한 것은 몇 살이냐? 고 물은 뜻에서 첨세병이란 이름도 유래됐다고 한다. 떡국의 시초는 확실치 않으나 삼국시대 전부터 신년 차례를 지낼 때 먹던 음복 음식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옛날에는 꿩고기로 국물을 만들었으나 서민들은 닭으로 육수를 만들어 “꿩대신 닭”이란 말도 생겼다고 하니 전해오는 말도 알고 보면 의미가 있다.

 

지역별로 떡국의 특징이 있는데, 대학 시절에 학교 뒷문에 있던 개성댁 음식점의 조랭이 떡국은 이색적이었다. 조랭이 떡은 개성사람들이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에 대한 원한으로 가래떡 끝을 조금씩 비틀어 잘라내 만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큰 올케언니는 고향이 이북으로 떡만두국을 선호했다. 이민 초기에 유학생들의 고향 생각을 덜어주고자 설 때는 밤늦게까지 만두를 빚었는데 만두를 만들며 이런저런 얘기로 젊은 엄마들이 오랜만에 힘든 타향살이를 달래곤 했었다. 음식 잘하는 막내딸은 요즘에도 설날엔 집에서 만두를 직접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먹는단다.

 

새해 아침엔 조상을 기리는 차례와 기도를 드리는데 우리의 예절에 익숙지 못한 사위도 엄숙히 잘 따라 한다. 어떻게 아는지 꼬마들은 옷을 갈아입고 세배를 한다고 서둘더니 차례 지내러 온 작은 할아버지에게서도 세뱃돈을 받고 신이 났다. 오후엔 오랜만에 윷놀이하면서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소리쳐 웃는다. 섣달 그믐날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하고, 밤에는 귀신이 신발을 훔쳐간다고 신을 감추고, 설날 이른 아침에는 복조리 사라고 외치던 그 옛날이 그립다.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인데, 1896년에 태양력을 쓰기 시작한 후 우리의 명절인 음력 설날도 억압당했고 한때는 정부가 이중과세라고 음력설을 없애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에서는 음력설 전후일 3일간을 공휴일로 정해 우리 고유의 설날 풍속을 되찾는다고 한다. 설날이 재충전되며 가족의 정과 우리의 삶이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진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온 가족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조상들을 기리며 세배와 덕담을 나누면서 서로의 안부와 계획을 얘기하고 웃음을 꽃피는 설날은 우리의 대명절이다. 지난해의 아쉬움과 후회를 감사로 마무리하고, 새해에도 온 가족과 친지들이 항상 건강하고 보람된 일들로 가슴 뿌듯한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설날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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