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수필

오랜만에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동네 지인들과 함께 집 앞 공원으로 나섰다. 올해 애틀랜타의 겨울은 유난히 따듯했다. 지난가을에는 모든 잎새를 떨어트리고 가지들도 많이 잃었건만 활짝 핀 벚꽃들이 회춘의 능력을 과시하며 우리를 반긴다. 인간은 생각을 통해서만 다시 젊어질 수 있을까.

 

많은 분이 날이 갈수록 연약해지는 자신들의 앞날 걱정과 건강 문제로 대화가 심각하다. 어떤 분은 장례비용과 비슷한 새로운 생명 보험을 알아보고, 어떤 분은 장기간의 의료 치료를 위한 비싼 보험에 새로 가입하고, 또 다른 이는 거절해왔던 자식들이 주는 용돈을 받기 시작했단다. 피할 수 없는 대화의 주제이지만 화사한 이른 봄을 느끼고자 고개를 돌리니 언덕 옆 이층집 울타리 밑에 노란 수선화들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환히 웃고 있다. 들러리처럼 수선화가 등장했으니 이제 곧 화려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튤립들이 내 가슴 속에 심어놓은 빨간 튤립의 추억을 새롭게 하겠지.

 

이민 생활 초기에 가난했던 우리 세대의 생활 습관으로 무조건 절약한 푼돈을 모아 수련생활의 고생이 끝나자 곧 내 집을 마련했다. 그 당시 쥐꼬리만 한 월급에,  비행기 값까지 제해가며 어떻게 집을 샀느냐고 미국인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주말에는 앞뜰에 진달래와 봉숭아도 심고, 그 앞 언저리에는 벽돌을 세워 사이사이에 색색의 튤립의 알뿌리를 묻었다.

 

튤립은 터키가 원산이며 백합과 식물로 수십 개의 종류가 있고, 꽃 모양이 머리에 쓰는 터번을 연상시켜 튤립이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품종개량으로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가진 꽃들이 생겨나서 수천 가지의 변종이 있으며, 점박이 꽃은 알뿌리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때문이란다. 1630년대에 네덜란드(홀랜드)에서 튤립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귀족들이 선물거래뿐 아니라 높은 가격으로 튤립 사들였다가 급하게 가격이 하락하면서 소위 튤립 파동 (Tulip mania)이 생겼다. 이것이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경제적 거품으로, 네덜란드가 영국에게 경제 대국의 자리를 빼앗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꽃에 대한 인간의 욕심이 한 나라의 경제를 좌우했다니 놀랍다.

 

 네덜란드의 마음씨 고운 처녀가 세 청년으로부터 구애를 받고 꽃의 신에게 의뢰해서 튤립이 됐다. 꽃은 왕관을, 줄기와 잎사귀는 검을, 뿌리는 보물 상자를 선물한 세 청년을 위해 변해서 아무에게도 시련의 상처를 주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래서 튤립의 꽃말은 사랑이다.

 

수십 년 전, 매일매일의 생활에 쫓기다 달력에서 본 유럽의 넓은 튤립 들판을 상상하고 만들었던 내 꽃밭도 잊었던 어느 일요일 아침에 갓 4살 된 아들이 숨을 헐떡이고 엄마를 찾으며 뛰어들어온다. 어디를 다친 줄 알고 놀란 나에게 꼬마 아들은 몇 송이의 빨간 튤립 꽃다발을 안겨주며 큰소리로 “엄마 사랑해”라고 자랑스럽게 외친다. 튤립은 색깔에 따라 꽃말이 다르다는데 나의 이 꼬마 애인은 빨간색이 사랑의 고백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을까? 나는 꽃을 따버린 아쉬운 느낌을 가슴속에 파묻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아들을 껴안아 주었다. 저녁을 먹으며 다음 해에는 여러 사람이 이 꽃들을 같이 볼 기회를 주자고 조심스레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는 흔히 우리 자기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각자의 입장, 주어진 상황에 따라 내 감정의 판단 기준을 조정해보면 어떨까? 나의 경험이나 제한된 지식에 의한 성급한 판단을 피하고 상대방의 진실한 의도를 이해하고 배려하면 좋겠다. 내 기준에 좀 어긋난 일이 있더라도 훗날에는 잊게도 되고, 때로는 함께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으로도 간직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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