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수필

윤재영 전쟁트라우마(윤재영)

webmaster 2017.03.12 12:33 조회 수 : 16

노란 꽃가루가 날릴 새 없이 마치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뼈아픈 눈물인 듯 전쟁터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이의 애통함인 듯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부활절 다음날 시아주버님이 돌아가셨다. 남편보다 열 한 살이 많은 시아주버님은 노후에 혼자되셨다. 일주일 전 전화를 받았을 때 목소리가 가라앉아 걱정했는데 독감 때문에 그런다고 하셔서 그러려니 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통화였다.

그는 1967년 월남전 (1975년 종결) 참전 용사였다. 가끔 한국 백마부대가 얼마나 용맹했는지 미군들도 벌벌 떨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철없던 학창시절 “달려간다 백마는.... 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들....” 하며 순수하게 응원하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노래를 불렀지 그 뒤에 일어나는 일들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시아주버님은 전쟁에 징병 되었다. 젊은 혈기에 조국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자부심으로 몇 개월 훈련을 받고 최전선으로 나갔다. 늘 어리게만 보이는 우리 아이들 나이였을 텐데 시어머님 마음이 헤아려진다. 마침 다달이 오는 잡지에서 월남전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94세 된 노모는 자다 말고 일어나 우리 아들 어디 있느냐고 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찾는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할진대 하루를 마다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예전에 그 모습이 아니었다.

    심한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사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외식하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시더니 자리를 바꾸자고 하셨다. 사람을 등지고 앉으면 불안하다고 방어 자세를 취하시는 거였다. 생사의 공포가 얼마나 심했으면 본능으로 각인 되었을까. 그뿐만 아니라 말로만 듣던 고엽제 섞는 것도 하셨다. 위험한 줄도 모르고 정글에 나무들을 없애기 위해 화학약품을 섞었다는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피부암을 앓으셨다.

    치료도 받고 상담도 받고 보상도 받았지만 그의 청춘을 앗아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었다. 기록에 보니 베트콩 섬멸 작전에서 나가면 살아남기 위해 조금만 의심이 가도 민간인을 죽여야 했다고 하니 말 못할 정신적 고통도 컸을 것이다. 퍼플 훈장을 비롯해 월남전을 기리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갖가지 방법으로 그의 공로가 인정되었다. 하지만 죽은 전우들 앞에서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부모님 뿐만 아니라 동생인 남편도 끔찍하게 위하셨다. 남편이 월남전에 참전하겠다고 하자 내 죽은 몸뚱이를 밟고 가라고 하며 죽어도 못 간다고 막으셨다고 한다. 동생이 형을 생각하는 것과 형이 동생을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것 같다. 동생과 함께 살아주어 고맙다고 하며 우리 울타리가 되어 주었는데 이 또한 우리 가족은 내가 지킨다는 전쟁에서 영향을 받은 강박관념인듯싶다.

죽음을 준비하셨는지 깨끗하게 정리된 그의 서랍에는 월남전에서 찍은 빛바랜 사진 몇 장만이 뎅그러니 남아 있었다. 막사에서 그리고 전투에 나가기 전 헬리콥터를 기다리는 동안 몇 명 전우들과 찍은 것이다. 짓궂게 폼을 재며 찍은 모습이 우리 아이들보다 어려 보였다. 그들이 처참하게 전쟁의 이슬로 사라진 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였다고 하니 그 충격은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날 전우들과 함께 죽었다. 아니 죽은 전우들과 죽는 날까지 같이 살았다.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동안 어딘가에서는 전쟁에 희생이 있었다. 일본강점기, 육이오 그리고 월남 전쟁,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고통에 시달리는 가족과 희생자를 기리며 내리는 비에 애도의 마음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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