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수필

최정선 봄바람이 불던날 (최정선)

webmaster 2017.03.28 16:59 조회 수 : 29

추억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지나온 발자취가 다 마음속에 간직되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인근 주(州)에 모처럼 찾아갔다. 노인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십 여 년 전에 떠나온 이후 몇 번 문안 전화했는데 그분은 열 배를 더 안부하신 자상한 분이다.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90을 바라보는 그분은 너무나도 많이 노쇠하였다. 그곳에 살 때는 뜰에 상추와 다른 채소도 심고 된장도 담고 그러셨다. 타국에서 식사 잘해야 한다면서 부지런히 찌개 끓여 먹으라며 된장까지 넉넉히 주셨다. 삼천포에서 살던 그분은 요즘 바다가 보고 싶어 강이라도 대신 볼 겸 왔다니까 어르신도 고향 바다가 그립다며 한참 풋풋한 바다 이야길 했다.

몹시 바람이 불던 날 할머니와 이틀 밤을 함께 자면서 추억 속의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만남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피차 생각하고 염려해주는 방향이 비슷하면 그리움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수한 타인처럼 지내게 되는 것이리라.

그곳에 살 때 계셨던 분의 안부를 물으면 세세히 정보를 일러주었다. 세상을 떠나신 분도 몇 명 있고, 멀리 타 주로 이사한 가정, 아예 한국으로 떠난 분, 당신의 손녀가 대학을 나온 후 결혼까지 했다는 이야기 등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떤 70대 장로님이 사별 후 26년 어린 아내와 살고 있고, 여의사였던 올드미스가 80세로 젊은 시절에 알던 의사가 있었는데 부인이 돌아가신 1년 후라 드레스 입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했다며 무척 기뻐하셨다.

그분은 8년 전 장남이 병으로 부인과 딸 넷을 두고 천국으로 떠남을 매 순간 안타까워하며 그리워하신다. 자식을 잃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 힘드셨을까. 며느리와 살고 계신다. 효부라 시모(媤母)를 잘 모시며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내고 있다. 피차 애쓰고 지냄을 역력히 느껴진다. 좋다는 침대, 의자, 발 마사지 기구 등을 장만 해 드렸다. 아이들 챙기고 일터에 가지고 갈 반찬 준비 등 연일 애쓰신다고 효부는 말한다.

그곳에 간 김에 드디어 정든 테네시 강가로 갔다. 바람이 몹시 분다. 미국에 살러 처음 왔던 때 외로움에 지쳐 꺽꺽거리던 시절이 생각났다. Y와 A에게 이곳에서 노을 보며 시 쓰고 친구가 없어 심심하고 갈 곳이 없어 쓸쓸했던 때 할머니는 그 맘을 알고 맛있는 거 먹여주고 위로해 주던 분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일하러 나갔기 때문에 말벗조차 없었다.

많은 날 자동차에 먹을 것과 책이랑 돗자리를 싣고 집에서 가까운 남북전쟁터로 간다.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엎드려서 책 읽고, 무심히 떠가는 구름 보고 새 지나는 것도 자세히 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지나가는 사슴 떼 소리도 듣고 그랬다. 그 덕분에  <테네시 강가에서 노을을 보며> 시집도 엮은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바람이 세다. 머리가 훑어지고 솟고 그래도 강변 찻집에서의 커피 맛은 일품이었다. 추억을 들어주고 공감해준 게 고맙다. 좋은 만남의 인연이라 소중하고 행복함이 봄바람 타고 훨훨 뜨는 느낌이 든다. 덕분에 기분전환이 되었다. 감사하다.

인연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렇게 즐거운 대화를 한다니 삶을 아름답게 해주는 선물 같은 보너스가 아닌가. 88세 어르신, 봄처럼 만물이 생동하는 때에 건강하시고 슬픈 추억에서 조금은 벗어나 손주들의 밝은 새 생활을 지켜보며 즐겁게 지내시길 원한다.

서비스 링크

X
Login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

아이디가 없으신 분은

회원가입 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X